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제2공화국 (문단 편집) === 루이 나폴레옹의 독재 (1851년 ~ 1852년 초반) === 이후 새로운 정부를 이끌어나갈 수반인 [[프랑스 대통령|대통령]]을 뽑기 위한 선거가 1848년 12월 10일 프랑스 전역에서 열렸다. 6월 폭동을 진압한 카베냐크, 정부 출범 당시 정신적 지주였던 [[알퐁스 드 라마르틴|라마르틴]]과 [[듣보잡]]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[[나폴레옹 3세|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가 안정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입후보한다. 이후 새로운 정부를 이끌어나갈 수반인 [[프랑스 대통령|대통령]]을 뽑기 위한 [[184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|선거]]가 1848년 12월 프랑스 전역에서 열렸는데... >“어디선가, [[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|헤겔]]은 세계사적으로 몹시 중요한 사건과 인물은 두 번씩 나타난다고 썼다.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어야 한다. 첫 번째는 비극으로, 두 번째에는 희극으로 나타난다고.” >---- >- [[카를 마르크스]] 『루이 보나파르트의 [[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|브뤼메르 18일]]』 그리고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듣보잡이 75%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.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하나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.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은 '나폴레옹'이라는 그의 이름에 열광하면서 그가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|삼촌]]처럼 다시 한번 프랑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 줄 것으로 믿었고, 부르주아 계층 역시 반사회주의 경향이 강했던 그를 밀어주었다. 노동자들도 6월 당시 자신들을 무력 진압한 공화정부에 분노하여 나폴레옹에게 표를 던졌다. 루이 나폴레옹은 초기에는 공화정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했다. 대통령 취임식 때 "하느님과 의회에게 맹세하건데, 통합적, 불가분의 민주공화국에게 충실할 것이고, 헌법이 내게 부과하는 의무를 다하겠다"라고 선언했다. 하지만 루이 나폴레옹은 집권 3년차인 1851년 12월 2일에 [[1851년 프랑스 쿠데타|친위쿠데타]][* 이 [[친위 쿠데타]]는 [[아우스터리츠 전투]]의 승전일에 이루어지도록 일부러 계획했다고 한다.]를 일으킨다.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, "혁명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을 것"을 약속한다. [[아돌프 티에르|티에르]], 카베냐크 등 의원들은 재빨리 반대파를 결성해 대항하지만 6월 폭동의 진압의 트라우마와 반대파의 리더십의 부재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. 개헌을 해서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늘려버린다. 이어 다음 해에는 자신의 황제 즉위 여부를 놓고 [[국민투표]]를 실시하고 결과는 당연히 압도적인 찬성.[* 734만 표가 찬성, 60만 표가 반대. 주목할 만한 점은 기권이 150만 표로 반대에 2.5배에 달했는데, 결과가 뻔한 [[짜고 치는 고스톱]]에 당대 사람들이 반대 대신 기권표로 조소를 표한 것이다.] 그렇게 프랑스 제2공화국은 4년 만에 끝장나고 루이 나폴레옹이 [[나폴레옹 3세]]로 황제 자리에 즉위하면서 [[프랑스 제2제국]]이 시작된다. [[분류:프랑스(19세기)]][[분류:유럽의 공화국]][[분류:19세기 멸망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